퐝, 2017
minolta af-c / e100vs / 호미곶, 2004
꽤 오래전 호미곶의 황금손을 보기 위해 포항을 들린 적이 있었더랬다.
예전에는 도달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지만, 이젠 KTX 가 뚫린 덕에 이젠 2시간 반이면 포항에 다다를 수 있다.
포항에 한번 다시 가보고 싶었다.
포항에는 연고도 없고, 특별한 추억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B급사진의 보물, 포항지부가 있는 땅이다.
그 분들이 계신 곳이라면 왠지 모르게 좋은 기운(?)을 이렇게 저렇게 해서 그렇게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행에는 저마다의 방법이 있다.
내 경우는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으로 계획이 시작된다.
음식이 정해지면, 그 식당의 위치를 거점으로 해서 시간과 경로를 정한다.
그것으로 나의 오랜 지병인 '결정장애' 를 해소할 수 있다.
많은 곳을 가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한 곳이라도 잘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묘미는 limitation 이다. 제한과 한계를 알고 즐기는 것,
제한 범위를 잘 파악하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6시간도 체류하기 힘들었던 이번 포항방문은 무위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뜻밖의 틈이 나서 포항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던 그날,
급작스례 PIYOPIYO 님께 포항의 핵심을 짚어달라며 기별을 넣었다.
관례가 그러했는지 '이 변방에 뭘 보려고 오냐' 라는 빈말로 시작한 메세지에는 포항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떻게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음식집부터 친절히 나열해 주시었다...
그렇게해서 방문할 곳이 정해졌다.
1. 포항특미물회
2. 죽도시장위판장
3. 평남곰탕
4. 송도해수욕장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도착한 포항역에서 택시를 타고 북부시장쪽의 '포항특미물회' 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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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점심시간을 조금 벗어난 시간 탓인지, 한산한 분위기의 식당에서 한적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전채로 나온 청어회무침
옛 뱃사람들이 먹던 원형을 보존했다는 물회,
여러가지 수식어가 붙은 물회가 있었지만, 일반물회를 선택했다.
어리버리하게, 어떻게 먹어요? 라고 하니
친히 그냥 물을 뿌려주셨다...
"비벼"
"네"
조미료 맛 가득한 육수의 다른 물회보다
훨씬 담백하고 맛있었다.
물회를 먹고난 후 공기밥과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얼큰한 매운탕이 제공된다.
포항특미물회 / 054-246-1490
경북 포항시 북구 동빈로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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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시장까지는 약 1.2km 로 해안을 따라 쭉 걸어가면 된다.
바다와 posco 로 집약되는 포항의 풍경을 여유롭게 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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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힌 실타래는 풀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나이를 먹은 탓인지 이제는 그냥 그대로 두는 게 마음을 푸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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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시장은 위판장을 중심으로 한 수산 시장과 일반적인 시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중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위판장의 열기는 뜨거웠고 생동감이 넘쳤다.
경매가 끝나면 위판장에 좌판이 펴지고 소매가 시작된다. 특별한 마감 시간은 없고 해산물이 품절되면 소매도 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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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포장까지 다했는데, 더 깎아달라는 말에 옆가게 아주머니까지 지원사격을 시작한다.
사는 것도 파는 것도 시장의 기본은 흥정이다.
'남는게 없다.' 와 '저긴 더 싸다.'
창과 방패, 결국 창 끝은 뭉툭해지고 방패는 흠이 살짝 나는 절충으로 마무리가 된다.
더 싸게 사고 싶다는 것도, 더 비싸게 팔고 싶다는 것도 욕심은 욕심일 뿐,
시장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포항을 생각하면 홍게가 떠오르곤 했다. 모월간지에서 포항을 소개할 때 보았던 홍게!!!
그것들이 수북히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넋이 나가기 시작한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포항을 어떻게 찍을지보다는 저것을 어떻게 하면 먹을 수 있을까 하는 궁리만 한창이다.
물론 홍게보다 대게가 더 맛있다고 한다. 그리고 더 비싸다.
문어는 또 어떠한가.
나는 문어귀신이지 않은가...
심장이 콩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먹는 것에도 제한이 있다. 한가지만 골라야 한다.
'문어'냐 '게'냐 그것이 문제로다...
'문어'냐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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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만 한다면 맛있게 쪄주실 분들은 많은데 말이다.
던질 것인가 말 것인가...
뭐,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쯤...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 줄, 다리병신 대게(경매결격품) 출현!!
"다리가 온전치 않은 대게들만 모았습니다. 열마리에 오만원이에요!"
유지보수 필요없이 소모되는 것들에게 가격이란 가히 절대적인 경쟁력이라고 볼 수 있다.
매일은 아니고 한달에 몇번 이런 기회가 찾아온다고 한다.
그외에 대게를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은 5-6시 소매가 파할때쯤 남은 것을 떨이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
주사위(오징어)는 던져졌다!
대게 파는 청년이 소개해 준 찜집으로 가서 주문 완료,
스티로폼 박스를 포함한 찜값 만원, 택배를 원할 경우 4천원을 보태면 된다.
혼자 놀러와서 미안했는데, 가족들을 먹일 생각을 하니 이리 뿌듯할 수가!!!
한일이 많으니(?) 이제 새참을 먹을 차례다.
유명세를 탄 '평남식당' 의 곰탕을 먹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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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식당은 죽도시장의 골목 한켠에 위치하고 있었다.
요즘같은 세상에는 지도어플 하나면 어디든 손쉽게 찾아갈 수 있다.
'하얀집' 같은 전라도 쪽의 곰탕과는 땟갈도 맛도 다르다.
토렴이 없는 따로국밥의 형태,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이렇게 탕에 달걀을 풀어넣는 것을, 중국이 고향인 분께서 해주신 미역국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북식이라고도 하고, 독특하긴 하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하얀집' 압승, 어쩌면 곰탕 자체를 하얀집의 그것이라고 규정해버린 내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줄서는 등 여행의 재미를 반감시킬 에너지 소모를 해가며 먹어볼 음식은 아닌 것 같다.
평남식당 / 054-247-9124
경북 포항시 북구 죽도시장3길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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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이제 송도해수욕장을 갈 차례다.
아... 내 고향 인천에도 송도해수욕장이 있었지...
PIYOPIYO 님 설명에 따르면, 한때, 조선10경중 하나였던 송도해수욕장도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포스코 건설로 형산강 제방이 만들어지면서 모래의 퇴적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해수욕장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한다. 그래서 망해버린 여관과 횟집들이 뒤엉킨 골목이 있다고 하는데...
왠지 골목 사진 전문이신 '소자'님께서 한번은 담으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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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는 오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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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나의 고독도 뽀도독 씹어보았다.
소주한잔 걸치고 이생진씨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를 일독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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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로망이었던 낮술은 커녕, 해질녘까지 술한방울 입에 대지도 못하였다.
예고도 없이 포항으로 밀고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예까지 왔는데 얼굴은 꼭 보고 가야하지 않냐' 며
바쁜 일정에서도 시간을 내주신 PIYOPIYO 님과 롯데마트에서 접선하기로 했다.
그는 경주에서, 나는 죽도시장에서 롯데마트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만났다. '너의 이름은' 에서처럼, '우린 어디선가 본적이 있지 않나요?' 를 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일반적인 비선실세들과는 달리, 범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유창한 화술을 구사하던
그는, 배려심 깊고 잘생긴 훈남이었다...
(사진은 생략하기로 한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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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식의 칼국수에는 반죽에 콩가루를 넣는다고 한다.
그래서 묘한 향미와 함께 면발이 더 꼬들꼬들하다고 PIYOPIYO 님께서 친절히 설명해 주셨다.
막걸리 안주를 위해 급하게 볶아진 두루치기 1인분,
마치 집에서 한 것처럼 정갈한 맛이다.
이집의 오랜 단골이며, 포항지부장 및 수영부대장 을 겸임중이신, 민뿡님의 소개에 의하면
계절메뉴인 동태찌개와 함께 하는 낮술이 아주 일품이라고 한다.
민뿡님의 업무일정으로 인해 이날 뵙지는 못하였지만, 다음엔 느긋한 일정으로 와서 낮술을 함께 하는 것을 결의해 보았다.
아... 술이 부족해 ㅜㅜ 술이 부족해 ㅠㅠ
과수원 칼국수 / 054-278-4430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자명로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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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에서의 만찬은 시작한지 30분만에 후다닥 끝이 났다.
나는 통금시간이 있는 남자이고, 기차 시간이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반가운 만남, 수다속에서 30분은 5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칼국수도, 두루치기도 막걸리도 후다닥 마셨다.
아쉽지만, 나는 생존을 위해 길을 나서야만 한다.
PIYOPIYO 님의 신들린 배웅으로 19:16 에 포항역 주차장에 도착, 간만에 전력질주를 하여 19:19분 간신히 기차에 탑승을 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포항에 오길 정말 잘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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퐝가고파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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