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동, 2021
귀향길에 한번은 내가 스쳐 지나왔던 공간을 더듬고 온다.
코로나 덕?에 나홀로 귀향을 한 덕에, 이번에는 차를 세우고 이 곳의 공기와 마주해 보았다.
약 30년 전 나는 이 곳에서 두 해 남짓 살았었다.
형은 바로 근처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었고,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50분 정도 거리의 국민학교에 다녔었다.
공간을 공유함은 여러가지 의미를 갖기에,
마찬가지로 만수동에 살았고, 나처럼 50분 거리의 시내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던 동창 녀석과 참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어느 가정의 아빠가 되었을 그 녀석도 잘 지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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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기억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희미했던 기억들이 공간을 직접 마주하자, 꿈틀꿈틀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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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관 앞에 도달한 순간, 나는 내가 살았던 곳의 호수를 명확히 기억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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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그 시절, 푸근한 인상의 경비아저씨께 신세를 참 많이 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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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에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무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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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러 가기 위해서 몇개의 횡단 보도를 건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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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의 개나리도 기억 속에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앙상한 가지위로, 봄의 기운을 머금은 노란 꽃잎들을 덧칠하기에는 큰 수고가 필요하지 않았다.
공간이 아직 기억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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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처럼, 이 중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이 곳에서는 초등학생 때만 살았었다.
초등학교 때는 등교길이 50분,
중학교 때는 등교길이 20분,
고등학교 때는 등교길이 30분,
대학교 때는 등교길이 2시간,
진즉에 이 길고 지루한 등하교 길에 지쳤는지,
나에게 출퇴근 길이 힘들지 않아야 하는 것은,
중요한 선택에 있어서 최우선 가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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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만 해도, 체벌도 심하고,
거친 아이들이 참 많았던 학교였다.
아는 욕이라곤 '개새끼' 가 최고 수위였던 내가 입학하자마자 느꼈던 충격은 어마어마했었다.
저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체육교사의 '깨스~' 한마디에 일제히 흙바닥에 엎어져 포복을 하고
'해제~' 한마디에 서둘러 원위치를 하던,
지금 세대에겐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을...
그 때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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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나은 모습을 보이고자,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나만 해도, 옛 기억을 회상하면
어찌나 부끄러운 것들이 많은지...
그러나, 언제나 답은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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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곳에는 작은 문구점과 떡볶이를 팔던 분식집 그리고 작은 슈퍼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었다.
문구점 앞의 사행성 짱겜보 게임기에서 한번은 잭팟을 맞이한 적이 있었다.
경품으로 교환할 수 있었던 것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허접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나,
그 땐 얼마나 기뻣었는지...
그 달콤함을 잊지 못해, 용돈을 참 많이도 갖다 바쳤었다.
짬겡보, 삐자, 얏삐~ 두구두구두구
그러나 대부분은 뻥/가~ 였다.
지금은 문구점도, 백원짜리 동전으로도 사먹을 수 있던 떡볶이 집도 없어지고,
큰 할인 마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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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켠에 빛바랜 주인 잃은 간판을 보니,
이 곳의 주인도 여러번 바뀌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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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주차장이 여유가 있어 보였는데,
지금은 주차장이 넘치고, 주변의 모든 도로에 갓길 주차가 되어있다.
플랜카드들을 보니 재건축이 진행되나 보다.
누군가는 30년의 세월을 버티고 버텨, 달콤한 열매를 수확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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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을 지나 저언덕을 넘어가면,
나를 신포동에 있는 국민학교까지 데려다 주던 15번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이 길은 30년 사이에도 변한 것이 하나 없었다.
그렇게 30년이 넘도록 공간이 품어 보존하고 있었던,
유년의 기억을 마주하고 돌아섰다.
몇 해 지나, 재건축이 된 후에도 그 기억들을 품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공간은 나를 불러세웠던 것이고,
마지막으로 내게 나즈막히 콧노래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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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1v / HP5+ / rodinal 1:25 / LS5000ED / 만수동,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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