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ca Sisyphus, 2021
Everything in this world is repeated. An "eternal regression," in other words.
I am Sisyphus living in the 21st century.
I, too am in the process of rolling up the stones raised by the Sisyphus from the 20th century.
Obviously, there would be same or different opinions. I have expressed mine based on senior Sisyphus' data and objective evidences and entities.
I believe in my judgment evidence-based.
I write not to evaluate qualitative or quantitative functions objectively.
I just write down my impressions and feelings.
If you could resonate with my writing, we would be both happy.
NOV, 2020
quanj
.
.
.
'시지프스' 는 살아오며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이름이다.
나는 좀 뒤늦게 대학생이 되어서야 알게되었는데, '개구장애'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음악그룹) 의 '엘도라도' 라는 곡의 가사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언덕사이에~ 갈 곳을 잃어 버린 모습, 끝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 외로운 삶처럼 살아온 것 같아......
우리 아이들이 시지프스(시시포스)를 접한 것은 아이들 필독서중 하나인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 에서였다. 아이들이 워낙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이다. 상태도 썩 좋지 않아서 팔아먹지도 못했던 것 같다. 첫째와 우연히 이야기를 하다가 시지프스를 찾기 위해 구석에 쳐박아 놓은 책들을 모두 뒤지고 있었는데, 멀찌감치 ZOOM 수업을 듣고 있던 둘째가 8권에 시지프스가 아니라 '시시포스' 가 나올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이 책에는 '교활한 시시포스' 라는 소제목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시지프스 하면 항상 튀어나오는 어려운 아우라를 가진 이 분,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이 책은 아내의 서고에 있던 것으로, 장인어른 > 아내 > 그리고 나에게 전해졌다... 마치 운명처럼,
.
.
.
그래, 그래서 시지프스가 뭔데??
가장 만만하고 접근하기 쉬운 위키, 나무위키의 설명을 먼저 읽어보자.
시시포스(고대 그리스어: Σίσυφος['sɪsɪfəs], 라틴어: Sisyphus)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다. 시지푸스, 시시포스, 시지프스, 시지프 등으로 표기하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이었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져 있다. 현대 작품으로는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가 있다.
시시포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시지프스의 지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우톨리코스(오디세우스의 외할아버지 : 도적의 신 헤르메스의 아들이자 도적의 왕) 와의 대결에서였다.
아우톨리코스는 아버지 헤르메스 신에게서 물려받은 능력으로 주변의 소들을 훔쳐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는데, 시지프스 왕 역시, 소를 도둑맞았다. 시지프스는 자기 소가 줄어들 때마다 아우톨리코스의 소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충분한 심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우톨리코스는 헤르메스에게 물려받은 능력으로 훔친 소의 색을 바꾼다거나, 뿔을 자르면서 성형을 한다거나, 심지어 소의 성별까지도 바꾸어버리는 등 변화무쌍한 일을 벌였기 때문에, 도저히 그의 도둑질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시지프스는 고민 끝에 소의 발굽 아래에 자기 이름을 새겨두기로 했고, 이 소들을 훔친 아우톨리코스에게 찾아가 발굽에 새겨진 이름을 보여줌으로써, 그것들이 자신의 소였음을 증명한다.
아우톨리코스는 시지프스의 부하들이 몰래 자기 소에게 이름을 새긴 것이라는 억지를 부려보지만, 이미 진 게임이었다. 아우톨리코스에게 부여한, 들키지 않고 도둑질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시지프스에 의해 무참히 깨졌기 때문에, 자존심이 구겨진 헤르메스는 시지푸스를 미워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오디세우스의 진짜 생부가 시지프스라고도 한다. 시지프스는 본인의 소를 훔친 대가로 아우톨리코스의 딸 안티클레이아를 정부로 달라고 협박했고, 안티클레이아가 시지프스의 유복자를 임신하자 이타케의 왕 라에르테스에게 얼른 시집보내버렸다는 것...
시지프스를 유명하게 만든 일화는 따로 있는데, 바로 아래에 언급되는 일화이다.
어느 날 제우스가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걸 보고, 시지프스는 아소포스에게 도시를 위해서 샘물을 내줄 것을 요구하며 그 대가로 제우스의 만행을 알려준다.
그것을 괘씸하게 여긴 제우스는 분노해서 시지프스를 황천으로 끌고 가라고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낸다. 그런데 시지프스는 타나토스가 올 것을 예상하고 숨어있다가 타나토스를 기습공격으로 제압한 뒤 지하실에 감금한다.
타나토스가 갇힌 후 세상에 죽음이 없어졌고, 가장 큰 피해를 본 하데스와 아레스는 제우스에게 항의하였다. 하데스는 황천의 신이었으니 일을 못 하는 상황이었고 아레스는 전쟁의 신이었으므로 전쟁에서 병사가 죽지 않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판본에 따라선 운명의 세 여신들도 실타래가 헝클어져 항의했다고 한다.
결국 제우스가 아레스를 보내서 타나토스를 구출했고 시지프스는 저승에 오게 되는데, 시지프스는 미리 아내에게 "내가 죽으면 절대 장례식을 치르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해놓고는 저승에서 아내가 자기 장례식도 치러주지 않았다고 거짓 눈물까지 보이며 연기를 했다. 이에 감응한 하데스는 다시 가서 장례를 치르라고, 혹은 시신을 내버려 둔 아내를 벌하고 오라고 시지프스를 지상으로 돌려보낸다. 당연히 시지프스는 약속을 어기고 지상에 눌러앉았고, 최종적으로 천수를 누리고 죽은 후 하데스에게 벌을 받게 된다.
이렇게 시지프스는 다시 세상을 떠난 뒤 신들을 기만한 죄로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받게 된다. 바위는 정상에 오면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올려야 하는 영원한 노동이다.
살아생전 하데스, 죽음의 신, 제우스 등 신들을 엿먹이고도 천수를 다누리다 평안히 죽은 비범한 왕이다. 니오베, 아라크네, 탄탈로스, 마르시아스처럼 신에게 도전했던 인간들은 하나같이 끔살을 못 피해갔는데, 시지프스는 살아생전 신들을 관광태우다 죽고 나서야 겨우 형벌을 받은 드문 인간이다.
시지프스의 아내는 플레이아데스 자매 중 하나인 메로페. 둘의 아들들 중 하나는 글라우코스 1세로, 페가수스를 탄 영웅으로 유명한 벨레로폰의 아버지이다. 그 외에 부부는 테르산드로스, 오르니티온, 할모스 등의 아들들을 두었다. 플레이아데스 성단중 가장 어두운 별이 '메로페' 라는 이유는, 그녀만이 유일하게 인간과 맺어진 걸 부끄러워해서, 혹은 남편을 따라 저승에 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헤르메스 탄생기에서 헤르메스가 아폴론의 소를 훔쳐갔을 때 아폴론에게 범인을 꼰지른 사람도 바로 이 시지프스였다고 한다. 정당한 일이기야 하지만 제우스의 입장에서는 신들 사이의 갈등에 인간이 감히 끼려고 하는게 내심 아니꼬왔던 듯. 고자질당한 헤르메스에게도 좋게 보일리 만무하고. 이를 보면 시시포스는 신들의 대소사에 여기저기 끼어서 점수를 팍팍 깎아나가던 인간이었던 듯 하다. 자신과 인간 입장에서는 통쾌하겠지만.
대한민국의 시지프스와 시작하는 초성이 같은 참고서의 표지에는 검은 바탕에 이 신화가 반투명한 글씨로 적혀있어 그리스 신화를 몰라도 시지프스는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알베르 카뮈는 이 인물을 통해서 자신의 부조리 문학에 대해 서술하는 에세이를 쓴 적도 있다. 그는 끝없는 형벌에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시지프스는 신에게 유일하게 반항할 수 있는 것이 그 의식(무의미함에 대한)을 없애고 무한한 반복을 즐기는 것임을 알게될 거라 했다. 즉 인간=시지프스.
현실의 동물원 비버들도 딱 시지프스와 같은 일을 겪는다. 비버는 나무로 집을 짓고 그걸 끊임없이 증축, 보수하면서 살아가는데 야생과는 달리 동물원에서는 집이 망가질 일이 드물어서 한번 지어놓으면 거기서 평생 놀고 먹을 수 있다. 이러다보면 비버들이 살도 찌고 건강도 안 좋아지니까 인간들이 일부러 정기적으로 집을 부수고 다시 짓게 만드는 것.
1999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박상우 저)은 시지프스 신화를 모티브로 하여 인간의 실존적 삶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품이다. 남주인공인 '민수'가 현실에 대한 체념과 비관에 빠진 거세당한 시지프스를 나타내고, 여주인공인 '주희'는 옥탑방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통해 편안한 삶에 안주하고 싶은 진정한 시지프스를 나타낸다.
무익하고 희망없는 일을 영원한 형벌로 받은 '시지프스'는 '호머' 의 말에 따르면, 인간들 중에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자였다. 또다른 전설에 의하면, 시지프스는 산적이었고, 꾀가 많은 것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욕심이 많고 속이기를 좋아했고 여객과 방랑자를 살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떤 설이 진실인지 따지는 것은 지극히 무익하다.
그를 현명한 왕으로 추앙할 수도 있고, 교활한 도적으로 폄하할 수도 있다. 시간의 살과 무수한 사람들의 의도가 더해져 구전된 이야기들은 원래 은유와 은유가 겹쳐 왜곡과 과장이 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을 발라내어 시지프스 신화의 뼈를 들여다 보면,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인다.
단순히 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살지 않았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판단했으며, 전략과 전술에 능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신의 눈 밖에 났고, 성난 신들이 그를 징벌하려 하였으나, 그는 신들을 오히려 농락하며 징벌을 피했다. 신이 부여한 최후의 형벌은 천수를 누린 시지프스가 직접 찾아가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건방진 면이 없지 않던, 지혜로운 시지프스가 받아들인 최후의 형벌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카뮈는 '인간의 이성과 세상의 불합리한 침묵이 대립할 때' 부조리가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공허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앞에 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제1의 방안은 <자살>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치명적 유희일뿐이다.
제2의 방안은 <희망>으로 그 역시 정신승리를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일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뮈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방안인 ‘자살’과 ‘희망’이 모두 삶을 직시하지 않고 망각과 무(無)로 도피하는 처사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세계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것은 <반항> 이다.
영겁의 회귀에 둘러싸인 시지프스 같은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살아가고자 하는 반항적 의지,
영원한 저주를 한 몸에 받아들여 감수하면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초연함,
그리고, 삶 그 자체에 대한 열정이다.
The struggle itself toward the heights is enough to fill a man's heart.
One must imagine Sisyphus happy.
시지프스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상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밀어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그토록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LE MYTHE DE SISYPHE by Albert Camus
나는 인생에서 수많은 회귀와 마주치게 된다. 하루살이같은 삶을 살아본 적도 있고,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을 바라본 적도 있다. 공을 들인 탑이 무너저 다시 쌓아 올리는 것을 경험해 본 적도 있다. 호기심이 많은 덕에 여러가지 삽질을 반복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고, 누구나 겪고 사는 일이다. 심지어, 게임속에서도 재현되는 것이 바로 Eternal Regression 이다.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나던 시절, 누구나 다 한 번은 해 보았을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 타령...
어떤식으로든 각자의 답이 있겠지만, 카뮈가 이야기한 시지프스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여유로운 웃음마저 지을 수 있다면 고민은 더이상 고민일 필요가 없다.
시지프스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겠지만, '영겁의 회귀' 대하여 천천히 탐구해 볼 참이다.
세상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감에 있어, 쉬운 길도 있겠지만, 길을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현인들을 곁에 두고 조언을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꽃길을 걸을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나처럼 내가 밟고 또 밟으니 길이 만들어진,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고운 길을 잘 찾아가는 이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숙명이 '삽질' 이라면, 이 또한 행복하다.
그렇게 살아가다 불혹(不惑)을 맞이했다.
Leica 에 대한 태도는, 내 삶의 방식에 대한 일종의 은유(metaphor)이다.
나는 21세기 이후가 되어서야 라이카 카메라에 관심을 갖고 접근했다.
취미영역에서의 이른바 엘리트 코스는 고수가 조언하는대로 한방에 준비를 잘 마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맞는 도구로 잘 즐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에겐 그러한 인맥도, 다른 무엇 하나도 없었다. 하나 하나 차근차근 직접 살펴보는 수 밖에...
소유하는 것과, 소유했던 것과, 사용하는 것과, 그것을 느끼고 아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다 보니, 나의 관점과 기준이 명확히 자리잡았고,
풍문에 떠도는 '뻘소리' 들은 잘 거르고, 마이동풍(馬耳東風)할 수 있게 되었다. 운무에 가려진 근본을 조금 조금씩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재미난 소재들은 꾸준히 남아있다. 나는 그것들을 천천히 즐겨나갈 것이다.
그렇게 나의 소감들을 정리하고 기록을 남겨 놓는다면, 언제가 다음 세대의 시지푸스들에게 좋은 돌덩어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남긴 뻘소리는 현명한 다음 세대의 시지푸스들이 잘 감별해 낼 것이다.)
간혹, 뭔가 한방에 가고 싶어서 정답을 찾고 싶어하는 이들의 질문을 받고는 하는데,
정답은 각자마다 다르니, 무엇이든 '각자의 표준' 을 정립할 수 있는 경험을 어서 스스로 해 보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를 한다.
표준(Standard)이란 것은, 참 좋은 것 같으면서도 간악한 가치이다.
무엇에는 무엇이 좋고, 뭐는 뭐고... 라고 공식처럼 정해놓은 것을 따라가길 바라는 것이 표준이다.
결국, 자기 뒤로 줄 세우는 행위다.
여기엔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족쇄 장치가 있다. 표준을 추종하게끔 충실하게 교육받은... 그것이 쉽고, 효율적이니까...
누군가에게 사진이 삶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라면,
남이 좋다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것을 해야 하며,
남이 좋아하는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내가 즐거운 사진을 찍어야 한다.
프로작가에 비하여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갖는 강렬한 이점,
사진을 마냥 즐거움으로만 접해도 모자름이 없다는 점이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나만의 시간은, 나를 위해 쓰자...
그렇게 자기만의 것을 꾸준히 쌓아나가면, 작가인지 아닌지는 후세에서 판단해 주겠지...
동시대의 평가는 어차피 정직하지 못하다.
내가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치 않고, 내가 다 겪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어차피 종점은 없으며, 한방에 가는 것이란 생각처럼 종결점이 아니다.
그렇게, 해 볼 수 있을만큼 시나브로 삽질을 계속해 나간다.
좋은 사진을 위해, 내 인생을 즐기기 위해,
2013년, 아내의 생일날 방문한 63빌딩에서 아내가 찍어준 사진이다. 시지프스를 떠올리려 한 사진이었는데, 많은 이들이 쇠똥구리를 떠올리더라. 그동안 나의 프로필로 사용을 했었는데, 불혹(不惑)을 맞아 나만의 시지프스 로고를 갖고 싶었다. 일단은 고전을 탐독한 후...
나만의 독특한 시지프스 로고를 갖고 싶었기에, 조금은 다른 그림을 원했다.
그렇게 삽화 작가를 찾던 중, 지인의 소개로 채건일 작가님을 만났다.
차분한 반항기, 아스라한 어둠과 밝음을 넘나드는 개성있는 그림들이 눈길을 끌었다.
시지프스를 표현하기에 좋다고 판단하여, 작업을 시작하였다.
시간을 길게 두고 절충 협의하여 독특한 시지프스를 만들어 내었다.
살아가고자 하는 반항적 의지, 영원한 저주를 한 몸에 받아들여 감수하면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초연함, 그리고 삶 그 자체에 대한 열정이 담긴 모습을 원했고 그것에 맞추어 그림이 완성되었다.
최종 산물은 나만의 카메라 상판에 각인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각인의 타각 스펙(깊이 두께)이 무척 중요했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하고자 한 내용이 축약되어 있는 'One must imagine Sisyphus happy.' 라는 문구도 넣고 싶었는데, 나는 타고난 악필이기에, 멘토이신 우면산 형님께 글씨를 부탁드렸다.
이렇게 따온 글씨와 그림을 배열하여,
나만의 상판을 완성할 것이다.
준비는 모두 완료되었다. 매우 간략하게 설명은 하지만, 최종적으로 무각인 알라카르떼 상판에 각인을 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엄청난 시행착오를 거쳤다. 지난 3년간 시행한 여러 삽질들은 결국 나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여, 모두 폐기되었다.
이제 각인만, 정교하게 수놓아지면 나는 편안하게 숨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
.
.
또다른 지인의 소개로 알게된 각인 작가님이 모든 타각스펙을 구현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여 의뢰를 하였다.
나는 최대한 예우를 갖추어 각인 작가분에게 직접 찾아뵙고, 이 그림이 그대로 상판에 재현될 것을 요구하며 작업을 의뢰했다.
더 세밀한 작업들을 예시로 보여주었기에, 나는 그분에게 작업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시간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오랜 경험들을 통해 그런 재촉으로 돌아오는 것은 악영향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업은 중반까지는 잘 진행되는 듯 하였다.
그런데, 디테일들의 재현이 critical 하게 시행되어야할 후반부 작업에서 사고가 났다.
각인 작가분이 나와 아무런 상의없이 간략화를 시켜 각인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안면부의 표정을 '안간힘을 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표정으로 간략하게 바꾸어 놓기까지 했다.
각인은 비가역적인 과정이기에, 매우 씁쓸했다.
이 분이 원래 이런 식으로 작업할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아마 무언가에 씌워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시지푸스처럼 돌을 밀어올렸고, 그것이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분이 돌을 아래로 굴러떨어뜨렸다. 어쩌면 이것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은 이미 벌어진 것, 수습을 해야 한다. 뒤늦게 각인 작가분도 자신이 무엇을 놓친 것인지 인지하였던 것 같다.
아쉽지만, 이래 저래 원본과 유사하도록 작업은 마무리되었다.
더운 여름, 세밀히 작업하시느라 고생하신 각인 작가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기대한 바와는 달랐지만, 마음에 든다.
인생이 뭐 다~ 이런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상판에 흔적을 아로새긴 나만의 카메라는, 내 기억 한편에 하나의 사연을 각인하며 완성되었다.
어드벤스 레버로 와인딩을 해나가는 것이 돌을 밀어올리는 것이라면, 리와인드 크랭크로 필름을 감는 행위가 다시 굴러떨어지는 돌이다. 이렇게 시지프스의 굴레는 우리 모든 삶속에 산재해 있다.
.
.
.
센스쟁이 채건일 작가님이 돌모양을 Leica 로고로 바꿔서 티셔츠를 선물해 주셨다.
딸들은 '아빠, 쪽팔린다. 아빠 라이카 덕후야?' 고 하지만,
아빠는 그런거 신경 안쓴단다~ 아빠 라이카 덕후 맞거든~!!
티셔츠를 선물받았던 주말, 친구가 찍어준 대판사진이다.
이 때는 아직 카메라가 완성되지 않아 들고 있는 카메라는 M10-R 이다.
안구 건강에 테러를 가하여 매우 매우 죄송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해 주시라 ^^;;;
이렇게,
Leica Sisyphus 'quanj' 는 또 다시 돌을 굴러올리기 시작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와야 끝이 납니다~)
Leica Sisyphus 로고와 카메라가 완성되기까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感'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의 봄, 2023 (0) | 2023.11.21 |
---|---|
East Sea, 2020 (0) | 2020.07.28 |
여행의 이유, 2019 (0) | 2019.09.17 |
신품? 미개봉? (0) | 2019.02.24 |
Kodak Ektachrome (E100) (0) | 2018.11.01 |